김홍일 장군
“ 백범 김구 선생을 도와 한인애국단 의거 폭탄을 지원하다 ”
1920년대 중반 이후 침체기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의열투쟁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으며, 이때 김홍일 장군은 의열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1년 김홍일 장군이 상해 병공창의 병기주임으로 근무 당시 임무는 각종 병기와 탄약을 관리하며 각 군에 분배하는 것이어서 얼마간의 권총과 수류탄을 공급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기에 무기 조달이 가능했었고, 이는 독립운동 군수물자 지원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며 한인애국단 의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인애국단 의거는 한·중 관계를 빠르게 회복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발판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결과는 김홍일 장군의 의거 폭탄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서 ‘왕웅(王雄)’이 폭탄을 지원했다고 나오는데, 바로 이 왕웅이 김홍일 장군의 중국군 시절 가명이다.
나는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두 개를 구입하였다. 하나는 왕웅(王雄)을 시켜서 병공창(兵工廠)에서 구입하였고 다른 하나는 김현(金鉉)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劉峙)에게서 구입하여 몰래 감추어 두게 하였다. 하나는 일본 일왕을 폭살하는 데,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중략…]
나는 죽시 서문로(西門路)의 왕웅(김홍일) 군을 방문하고 상해 병공창장 송식표(宋式驫)에게 교섭하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어깨에 메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서 보낼 터이니, 속에 폭탄을 장치하여 3일 이내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 김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백범일지>(돌베개, 2014) 중에서
“ 한인애국단 1호 단원 이봉창 의사와 김홍일 장군 ”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인 이봉창 의사는 일왕 저격 의거를 위해 백범 김구 선생에게 원거리에서 던질 수 있는 폭탄을 요구하였고, 백범 김구 선생은 이러한 내용을 김홍일 장군과 상의하였다.
이후 김홍일 장군은 폭발력은 약하지만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하기 간편한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 백범 김구 선생에게 전달하였고, 이를 전해 받은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비록 아쉽게도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실패하였으나, 중국 기관지인(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중국인의 간절한 항일정신을 대변하여 주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적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윤봉길 의사 의거를 비롯한 항일투쟁의 도화선이 되어 훗날 광복군 창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와 김홍일 장군 ”
김홍일 장군은 윤봉길 의사 의거에 사용할 폭탄도 지원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본군이 상해사변 전승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는 기념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폭탄을 투척케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다시 한 번 김홍일 장군에게 고성능 도시락 폭탄과 물통형 폭탄을 요청하였고, 김홍일 장군은 즉시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교훈 삼아 준비된 폭탄 사용 방법을 배우며 거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된 폭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에 손에 들려 상해 홍구공원에서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가 있는 단상을 향해 투척되고, 이로 인해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육군 대장을 비롯해 침략을 선도하였던 일본군 주요 인물들이 섬멸 당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추후 국민당 정부는 일제 패망까지 군정 양방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크게 후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