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장군
“ 한국전쟁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서 한강방어선을 지켜 대한민국을 구하다 ”
김홍일 장군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대부대 지휘 경험과 다양한 전투경험을 지닌 국군 내 유일한 고급장교였다. 개전 초기, 북한의 공격으로 국군 5개 사단이 붕괴되자 전략적 식견이 풍부하고 유일하게 사단급 이상의 지휘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은 한강방어를 책임일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전황은 한 치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위기상황이었고, 한강 이북에서 싸웠던 국군의 주력들은, 한강 이남까지 내려와 혼란한 상태였다. 이에 김홍일 장군은 육군보병학교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부대를 정비하여 대대규모로 혼합 편성된 병력으로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거듭된 철수로 장병들의 피로는 극에 달한 상태였고, 무기와 장비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군 제24사단이 한강선까지 진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일 이상이 필요했고, 만일 3일 이내에 적이 한강을 도하하여 추격하여 온다면 부산에 상륙을 시작하던 미군도 다시 철수해야 할 처지였다.
김홍일 장군은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시흥과 안양 일대에 대형 취사장을 만들어 장병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민가의 문짝을 뜯어내고 “미군참전”이라고 크게 쓴 간판 수십개를 제작하여 낙오병이 철수하는 길목에 세우게 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또한 방어진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장병들에게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며,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줬다.
이러한 김홍일 장군의 진두지휘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미군이 요청한 일수의 2배인 6일 동안 막을 수 있었고, 미군 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한강방어 전투 시찰과 미 지상군과 유엔군 참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한강방어 전투 시찰을 계기로 구상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김홍일 장군의 한강방어선 사수는 한국전쟁 최대의 사건이자 분수령이었다.